이명아 개인전 <나의 그리드 My Grid>,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기억하는 자'의 세련된 엔트로피 조율 감각
편집된 기억
누구나 인생을 뒤돌아보면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이 누구나 겪고, 매일 반복해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시간이 흐른 뒤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과거는 대부분 자의적으로 편집한 텍스트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했던 것들은 퇴색되고 가물가물해진다. 오염되고 파편화되어 순서가 뒤죽박죽되기 일쑤다. 급기야 사라지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자기가 희구하고 편한 방식으로 편집한 것에 불과하므로,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를 두고 미국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데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저서《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2012)에서 우리 안에 있는 ‘두 자아’를 언급한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다. ‘경험하는 자아’는 현재를 감각과 감정으로 느끼는 자아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현재를 자신에게 해석해서 들려주는 자아이다. 경험하는 자아가 ‘사실’에 가깝다면, 기억하는 자아는 ‘해석’에 가깝다. 나아가 카너먼은 ‘우리의 뇌가 우리가 경험했던 사건 중 고통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그것이 끝날 때의 느낌을 사실보다 오래 기억하고 사실이라고 믿도록 진화해 왔다’라고 말한다. 왜 인간은 그토록 바라는 쾌락보다 고통을 그리고 가진 것보다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더욱 강렬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하는 걸까? 그리고 왜 예술가들은 그것을 평면으로, 입체로 불러내 더 선명하게 하고 타자들에게까지 보여주려는 걸까?
'기억'을 불러내는 콜라주 드로잉
이명아는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는 자’다. 자기 삶, 사건, 인물 그리고 일상을 회상하며, 그것을 콜라주 드로잉과 도예를 통해 기하의 세계로 표현한다. 그의 기억은 ‘사실’보다는 ‘해석’에 방점이 있다. 이명아의 작업은 작가의 생의 어느 날의 기억, 경험, 감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다채로운 아카이브 수집이 출발이다. 모눈종이, 반투명한 트레이싱 페이퍼, 투명 필름, 라벨 스티커 그리고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아트포럼(Artforum), 미술관련 단행본과 도록 등에서 오린 텍스트를 사용한다. 뿐만아니라 여행이나 일상 중 기하로 보였거나 흥미로 느낀 사물들을 수집하면서 소재로 사용한다. 종(種)은 다르지만, 모두 ‘발견된 오브제’ 차원의 것이다. 그의 작업은 자기 자아에 관한 확인이자 궁구지만, 순수미술과 공예, 디자인을 관통하는 조형 예술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기도 하다.
작업의 시작은 드로잉이다. 작가의 드로잉은 종이 위에 연필이나 펜을 사용해 대상의 윤곽을 닮게 재현하는 일 혹은 본 작업을 구체화하기 전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는 밑그림 차원의 습작이 아니다. 작가에게 드로잉은 일기 쓰기처럼 일상적이고 손쉽게 언제나 펼칠 수 있는, 그러나 매일을 눈으로 기록하고 퇴색과 사라짐, 왜곡을 확인하는 자의적인 기록이다. 이번 <나의 그리드 My Grid>전에는 그간 발표하지 않았던 <Untitled 2024>, <시간의 형상> 등 재료와 그리드 전개 방식이 다른 다채로운 드로잉 연작을 수선하고 전시 작품 구성에 무게를 두어 발표한다.
2014년 <blue Journey>전의 원형 도판 설치를 제외하고, 이명아의 화면은 대부분 사각 혹은 직사각형이다. 사각형은 원형에 비해 완결성이 강하고 간결하다. 같은 사각형, 크기라도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힘은 다르다. 하얀색 테두리를 살린 모눈종이를 즐겨 사용한다. 그 위에 삼각형 조각 변의 길이를 기준 삼아 펜으로 모눈종이 위에 종과 횡의 직선을 긋는다. 선 긋기로 기존 모눈종이 격자의 견고한 질서를 흔드는 동시에 새로운 그리드를 생성시킨다. 풀로 붙인 삼각형 조각의 45도 각도 기운 빗변을 대칭축으로 두 개의 삼각형을 맞물려 정사각형을 만든다.
작가는 화면의 바탕, 기하 단위의 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인쇄물을 자른 삼각형은 원형 라벨지로만 채운 만든 삼각형에 비해 닫힌 느낌이다. 그러나 열림과 닫힘은 상대적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전면으로 두고 그로부터 몇 발짝 떨어져 조망하면, 패턴/이미지가 있는 영역은 닫힘이고, 패턴/이미지가 없는 영역은 열림으로 명확하게 인식된다. 이 무수한 열림과 닫힘의 연결이 화면 속 엔트로피를 증폭시킨다. 장마다 차이와 반복의 출렁거림이 다르지만, 이것이 우리의 망막을 흔들고 몸이 반응하는 리듬의 원인이다. 이 에너지가 관객의 눈과 마음을 동하게 하고 말을 건다.
작가는 출렁이고 요동치는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 기하/이미지의 연속적 리듬과 진행을 끊는 ‘공백’을 두었다. 분명히 숨구멍이다. 멀리서 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형국이다. 규칙적으로 엔트로피가 고조될 때, 열림의 의도는 배가된다. 1940년대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뉴욕의 활기에 반응하여 그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에서 수직선, 수평선으로 분할된 팽팽한 화면에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을 칠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넓은 공백을 남겨 두었던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그는 우리가 자극을 정확하게 인지하려면 심안(心眼)을 열고 촉(觸, 주관과 객관의 접촉 감각으로 생기는 정신 작용)이 발휘될 영역, 즉 공(空)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명아가 유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그린 몬드리안이 1930년대-40년대 유행한 재즈 음악과 춤에 조예가 깊었던 취향에서 발생한 것임은 잘 알려진 바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역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듣고 느낀 리듬을 점으로 표현했다. 이와 견주어 이명아의 작품을 보면, 그 역시 음악을 눈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선과 면, 색채, 질감을 단순한 모티프처럼 활용하여 율동적으로 변주하고 그사이 공백을 쉼표처럼, 스타카토처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드로잉과 도판을 전시 공간에 가지고 나가 시리즈를 단위로 공간의 적재적소에 배치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열림과 닫힘을 증식한 엔트로피의 장
바탕을 비롯해, 그 위의 올라가는 이미지 조각, 기하, 선은 각자 자기만의 힘, 어조, 온도, 방향성이 있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라벨 스티커, CD 같은 공산품도 마찬가지다. 흔히 문구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나, 제조처마다 색, 크기, 질감, 광택이 미묘하게 달라 원하는 것을 찾으면 대량으로 구매하여 확보한다. 드로잉을 위해서 지속적인 탐색과 수집이 필요하다면, 도예 작업에서는 실험과 경험이 필요하다. 도예 작업에서 기하와 층위는 유약, 백토 슬립과 색의 조합, 전사지 등 재료와 방법으로 차이를 만든다. 같은 노란색이어도 유약을 바른 것과 색슬립 위에 투명유를 덧시유한 것/ 불투명유를 덧시유한 것의 느낌은 각자 다르다. 이명아의 작업에서 두께와 질감으로 차별화드는 층위는 시각성과 촉각성의 중요한 변수다. 드로잉에서는 투명 필름과 트레이싱지, 모눈종이를 사용해 층위를 차별화한다면, 도예 작업에서는 투명유/불투명유, 색 안료/유약/전사지, 번조 온도 및 순서 등을 종합적으로 적용해 종이 드로잉과는 다른 층위를 만든다. 만약 작가가 지평면과 같은 높이의 색 띠를 원한다면, 원형부터 층차를 두어 조각한 후 석고 틀을 제작한다. 그 안에 색이 다른 색슬립을 시간차를 두고 부어 균질한 표면을 얻는다. 색 안료의 종류마다 번조 후 수축률이 다르다. 사전 실험 축적과 경험, 면밀한 계산이 필수다.
또 다른 예로, 틀에 순차별로 색이 다른 슬립을 부어 층위를 만드는 것과 유약을 붓으로 칠하는 것, 전사지 그리고 은과 금 러스터 유약으로 삼벌한 것의 형질이 모두 다르다. 재료와 방법을 달리해 불에 구운 타일 표면을 각각 손으로 훑어보면, 눈으로 보았을 때 크게 보이지 않던 차이가 손끝에서 느껴진다. 이 차이가 미미하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중요하고 큰 차이다. 이것은 작가가 종이 드로잉을 도예로 달리 시도해야 하고 결과를 눈으로 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동시에 도예가로서 느끼는 재미, 작업의 동력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에 걸맞은 재료의 무늬와 색의 어우러짐, 그로 얻을 표정, 그 표정이 밖을 향하며 말을 거는 것을 빠르게 눈으로 확인하는 데는 드로잉이 도예 작업보다 훨씬 속도 빠르고 간편하다. 도예 작업은 철저한 통제와 의지 관철이 불가능하다. 간결한 기하 블록의 정확한 맞물림과 깔끔 반듯한 선, 명확한 움직임, 질서 정연하고 명확한 메트리스의 구축을 감각적으로 추구해 왔다면 도자예술의 불확실성은 불만족스럽다. 그러나 이명아는 십 수년간 쌓은 능숙한 공력과 풍부한 경험으로 도자예술의 불완전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줄이고 숨기며 자기 경험과 감각이 충분히 발휘된 세련된 기하와 색, 질감의 세계, 리듬을 다양하게 변주해 왔다. 지금도 모든 것을 의도대로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완전함과 유연함이 전체의 균형미와 완결성을 위협하거나 방해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고 작가의 경험과 시각이 농후하게 익으면서, 전작에 비해 손을 놓을 곳에서 놓을 줄 알기에 남긴 아날로그적 요소와 변칙성이 자연스럽다. 그것이 오히려 전작에 비해 전체적인 규칙 안에서 다양한 시각성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별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할 것으로 생각한다.
'기억하는 자'의 세련된 엔트로피 조율 감각
푸른 기억과 심상의 지층:
이명아의 도자세계를 만나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정서를 갖고 있다. 존재의 잉태 그 순간부터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혹여 성장하면서 갈등을 겪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안식과 위로의 절대적 처소는 바로 어머니이다. 개별적 주체로서의 그 어떤 무게도 어머니와의 관계 안에서는 부드럽고 가벼운 아이의 본성으로 돌아가곤 한다. 자궁이 최초의 집이었던 태아의 아늑한 기억을 미래의 성인이 될 아이는 맘과 몸에 각인하고 이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존재와 그 흔적으로서 어머니와 아이는 타자이지만 결코 타자일 수 없다. 때때로 어머니에 대한 상념을, 그리움을, 정서를 떠올리는 것은 달리 말해 자신 스스로의 기억의 기록이다. 문득, 어머니에 대한 이런 사유를 일깨우는 이명아의 작업이 반갑고도 소중하다.
푸른 기억과 어머니
지난 봄 우연히 작가의 작업을 본 적이 있다. 두텁고 진한 갈색의 깊은 맛을 내는 둥근 원형의 도판(陶板)에 사방으로 글들이 양각된 작품이었다. 작가의 정갈한 기질이 그대로 느껴지는 깔끔한 판과 서로 다른 크기의 글들이 서로 맘을 모아 둥근 하나가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소간 무거운 분위기임에도 간결한 형태미가 돋보이는 원판들을 지긋이 바라보니 어느새 평온한 대지의 숨결이 전해졌다. 그때 작가가 건넨 얘기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입니다.” 였다. “이번 전시는 어머니와의 추억 또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이 주된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라고 작가는 덧붙였다. 그땐 도판 위의 내용이 무엇인지 필자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를 추억하고, 그런 자신을 기억해내는 작업의 여정이 작가에게는 매우 특별한 교감의 되새김인 듯 하였다.
4개월 남짓 지나 운 좋게 다시 작가의 작업을 만났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왔을 작가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한점 한점을 눈으로 만졌다. 이전에 봤던 작가의 원형 도판 시리즈 그리고 ‘푸른 기억과 어머니’를 보여주었다. 이는 작가 이명아의 익숙한 사각형 형태의 도판들과 꼴라주 드로잉이 한 곳에서 만나 현실 속 기억의 층위들로 재구성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과거로부터 그리고 현재 다시 상기되어 여전하다는 의미로 필자는 이 시리즈들을 ‘푸른 기억’이라 칭한다. 어머니라는 특별한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기존의 작업들과 차별화된 점들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근작들 역시 작가의 기억과 흔적의 오랜 테마와 일맥 상통해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기억과 흔적의 메트릭스
작가의 작업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 속에 지나치는 사건과 감정의 압축적 이미지로 재현되어왔다. 시간과 공간의 교차적 지점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무엇으로서의 기억과, 유무형의 존재의 궤적으로서 흔적은 개인에게서나 집단에서거나 간에 절대적인 역사를 형성한다. 작가의 작업에는 기억과 흔적이라는 추상적 테마가 일관되게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테마는 자신만의 감수성과 질료적 탐구를 저변에 드리우고 기하학적 형태의 구축미로 형상화되어왔다. 대체로 작가의 이 같은 태도는 도판의 균질한 사각패턴에 따른 리듬감있는 배치와 완결된 구조의 조형적 특성으로 간추려진다.
구체적으로 작가의 작품사를 보면, 1999년 제4회 개인전을 기점으로 이전의 시기는 흙과 색의 실험을 했던 탐색단계로, 1999년부터 제5회 개인전이 열린 2004년까지가 본격적인 기하학적 조형성의 반복과 운율의 전개단계로, 2004년이후부터 2007년까지 사각형의 압축적 평면성이 재구성되는 단계로, 2007년 이후 현재까지 이전의 일체의 과정들이 다시 재편성되고 확산되는 단계에 있다.
초기 탐색단계에서의 흙에 대한 속성과 색과의 결합은 현재까지 꾸준한 질료적 실험을 하게 하는 토대가 되는 과정이었다. 유학시절에 대한 작가의 회상을 통해 조형적 실험은, 도자의 물성과 조형성 둘 다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 도자와 컨템포러리 미술의 다양성이 수용되던 그 무렵, 작가는 기질적으로 미니멀리즘적 조형성 특히 한국의 모노크롬적 색채와 형태를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작가의 시리즈는 한국 전통 건축의 지붕에서 만나는 기와의 형상성과 색채에 근거하여 이를 도시적 감수성과 인상으로 새롭게 번안하고 구성하였다. 진한 먹색의 고즈넉한 느낌을 흙 소성 실험으로 만들어내고 암키와, 숫키와 그리고 변형된 기왓장은 자신만의 기하학적인 반복적 형상성과 조형미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같은 지붕의 이미지로부터의 색채와 형상의 기본적인 특성은 차츰 사각형이라는 기본적인 작업의 유닛을 도출케 하였다. 이 사각형의 형태가 이후의 작업에 기본적인 모티프가 되었고, 기하학적으로 재구성된 수평적인 도시의 풍경은 2004년 수직적인 구조와 형상성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예컨대 (2004)에서는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먹빛과 갈색의 다양한 느낌이 정갈한 사각형들의 혼성적 결합으로 완성되었다. 이때의 입체적인 느낌의 사각 표면은 2007년의 시리즈에서 수평적으로 압축되면서 작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심상의 도자 드로잉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사각형의 기본단위는 도심의 건축물들이 지닌 반복과 차이 처럼 구조화되었고 사이사이 글과 수평적 패턴이 드러났다. 간결하게 마무리된 기억의 심상들과 더불어 언어적 파편들이 존재의 흔적들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현재까지 기억과 흔적의 단서들과 현재적 지점들의 결합을 통해 자신을 보여왔던 것이다. 얼마 전 보았던 작가의 작업들은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 빚어지는 기억과 흔적의 메트릭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심상의 기억과 기록 사이
작가는 완성된 근작들에서 어머니와 자신의 기억을 추억하며 재현하는 일체의 작업들을 세가지 타입으로 제시하였다. 첫번째는 올곧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상징물로서의 원형 도판 시리즈이다. 이 원형 도판들 위에는 서로 다른 크기의 글들이 둥글게 하나가 되어 있는데, 작가에 따르면 시편 23편의 내용이라 한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던 작가의 어머니는 시편 23편을 특히 좋아하셨고 이것이 작가에겐 어머니에 대한 중요한 심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원형의 형태는 작가의 작업에서 이례적인 부분이다. 지난 해 가족사와 작업의 본분 사이에서 우연하게 원형의 판형만이 허락되던 순간에 선택된 운명적 형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형의 도판 중심엔 작은 종이 하나가 놓여있다. 생전의 어머니는 여행 기념품으로 종을 모았단다. 작가에겐 핸드벨이 유년시절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았던 즉 모든 가족들을 경청케했던 소리의 기억이기도 한 탓에 더욱 뜻깊다. 두번째 타입에서 필자가 지칭한 ‘푸른 기억’ 시리즈는 어머니와 작가의 기억이 혼융된 것으로 드러난다. 작가의 기존 작업의 양식이었던 사각형의 도판들과 기억의 단서가 된 이미지와 글들을 함께 직조되듯 재구축하였다.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의 한 조각, 그래서 자신이 찾아보았던 이미지와 기억의 잔상이 그대로 심상의 지층으로 남아있다. 세번째 타입에서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로서 그간의 작업의 파편들이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 담겨있다. 이전의 삶과 작업의 여정으로부터 기인한 심상의 층위들을 한켜한켜 담아놓은 것만 같다. 그렇게 작가는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기억하며 다시 밝은 한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 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 정한모
푸른 기억과 심상의 지층: 이명아의 도자세계를 만나다
Infomag 2007.12 (No.79)
흙으로 만든 기억의 조각
기와집 아궁이나 옹벽에 바른 거친 질감부터 잘 구워낸 도자기의 빛나는 부드러움, 그리고 도양적인 정서를 가진 도예작품의 따뜻함까지 흙이 주는 영감은 끝이 없다. 작가는 흙 안에 인간의 기억과 시간의 영속성을 담았다.
최근 세계 미술계에서 도예 작업들이 보이는 모더니티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한 편은 전통적인 도자기의 본질에 가깝도록 미학적 요소를 극대화하면서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흐름이고, 또 한편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도예에게 입혀진 편견을 깬 독창적인 작품으로 장르의 한계에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특히나 도자기의 역사가 길고 우수한 한국에서는, 도예는 응당 ‘청자나 백자가 연상되는 항아리 형태의 그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 가운데, 도예가 이명아는 흙을 자유롭게 변형시킨 작품 포맷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하게 담아 회화나 설치미술과 같은 접근을 시고하고 있다.
도예가 이명아의 아틀리에에서는 ‘아트’보다 ‘흙’이라는 오브제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공방은 여는 작업실과는 달리 색색의 흙이 담긴 자루와 거대한 오븐처럼 생긴 현대식 가마만 덩그러니 놓인 담백한 공간이었다. 흙 자루 옆에는 소송(가마에 굽는 과정)을 거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타일 형태의 작품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곧 열릴 개인전의 주제이자, 동명의 작품인 the Second Puzzle을 구성하는 소품이다. “이번 작품전의 주제도, 지금까지 꾸준히 해왔던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흔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Second의 두 가지 쓰임-초를 나누는 단위로서의 명사, 부사적인, 잊혀진 것을 뜻하는 형용사-이 공통적으로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함축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에게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는 무척이나 가별하다. 흙이 수 천, 수 만년 동안 쌓이면 기후나 지각변동의 영향을 받아 다른 색과 물성을 가지며 지층을 이루는 것처럼, 인간의 기억이 사람들마다 다르게 남아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에서 재료와 주제의 교집합을 찾았다. 80년대 초반, 미국 유학 시절의 작품들은 자연 그대로의 흙색이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 직접적으로 기억의 단면을 묘사하고 있었다면, 현재 작품들은 컬러를 입히거나 인간의 언어를 써넣는 시도 등으로 진화했다. “나는 출신교 학생중에 미국 유학생 1호였어요. 같은 향수병을 가진 친구들이 없어서 외로운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결혼을 일찍 한 탓에 남편과 어린 아기를 한국에 두고 혼자서 작업에만 매달렸던 시간들은 아무리 바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의 연속이었죠.” 사람들에게는 모두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기억은 다르게 남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 해도 서로 다른 것을 추억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짜 현실과 기억의 잔상 사이에서 인생의 모습을 찾는 과정이, 추억에서 발로한다는 느낌은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킨 오브제는 지붕이다. 십 년 전 우연히 경희궁에 갔다가 복원사업 때문에 지붕을 떼어 내는 것을 본 작가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가장 위를 덮는 채 말없이 인간을 감싸고 있는 공간적 안온함을 지붕에서 찾았다. “하늘을 마주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최전방에서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 삶의 공간을 품고 있는 듯 했어요.”
지붕을 모티브로 하는 시리즈는 다양한 변형을 거쳐 연속 작업으로 진행됐다. 초기 작품들은 지붕을 정면에서 내려다 본 각도로 모양과 텍스쳐를 달리하여 다양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멀리서 보는 듯 단순화된 디테일로 시간의 장단을, 기하학적인 무늬와 스크래치로 기억의 희미함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을 맞추어 가는 것과 기왓장을 이어 지붕이 완성되는 것도 묘하게 어울린다. 근작 중에서는 가마에 구울 때 연기를 먹여 탄화물을 입히는 방식으로 기와의 먹색을 되살려 전통적인 따듯한 색감을 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적인 도예의 특성은 어떤 작품에서든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동양적인 색채를 일부러 지운다고 해도 모던한 동시에 고풍스럽고, 색감을 화려하게 해도 은은한 맛이 있어요. 직접 그 감촉을 느껴보지 않아도 거친 듯 부르럽고 투박해서 따듯한 질감이 느껴지거든요.” 이 같은 이유 덕분에, 동유럽과 러시아, 미주 지역에서의 전시가 호평을 받기도 했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도시에서 고향의 안온함을 느낀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뉴욕에서 공부한 이명아 작가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얼굴을 알고 있다. 작가가 개인적인 경험과 솔직한 감상이 충분히 녹아 든 주제를 통해서 작업이 나와야 자연스럽고 깊이가 있음을 알고 있는 그녀가 서울의 모습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 했다. “출퇴근 길에 늘 영동대교를 건너요. 아침저녁으로 내가 보는 것은 누군가는 딱딱한 도시의 인공적인 모습이라 할지도 모를 마천루들과 다리 풍경이지만, 이 모습이 날씨나 하루 해를 따라 얼마나 다른데요. 빌딩숲이라도 그저 차가운 돌덩어리가 아니라 생동감이 있음을 발견했지요.” 그녀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스카이라인에서 차용했다. “나는 뼈 속까지도 도시 사람이예요. 익숙한 만큼 세밀한 도시의 표정과 기운을 느낄 수 있지요. 21세기 식 지붕을 한 가지 이미지로 설명해야 한다면 건축 기술의 극치를 저마다 자랑하는 개성적 디자인과 현대인들의 삶이 스며있는 높고 낮은 건물 숲이야 말로 우리 삶의 터전을 덮는 지붕이 아닐까요.” 계단처럼 보이는 직각무늬들은 멀리서 본 스카이라인을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단수화 시킨 것이다. 금속성 표면의 광택은 퓨처리즘의 영향을 받았고 기억의 파편 같은 작은 문양들과 언어의 활자들을 가미해 인간적인 느낌을 잃지 않았다. 홍익대학교,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 Pratt Institute M.F.A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작가는 현재 국립서울산업대학교 도자문화디자인학과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바쁜 학사 일정에도 6번의 개인전과 20여 회의 국내외 단체전을 거쳐 올 겨울 일곱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유학 시절 경험했던 초심을 잃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추상적이되 테크닉은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겠노라는 다짐이 있어 굽는 기술, 색을 내는 기술, 유약 등을 꾸준히 연구하고, 작품 수의 2배 이상 작업을 한다. “대학 진학 이후 10년 가까이 공부하고 떠났지만 문화적 충격에 가까운 경험이 많아요. 나의 가장 섹시한 모습을 자화상으로 그려오란 과제가 있었는데, ‘섹시함’을 해석하는 코드는 육감적인 몸매를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상상력을 이용해 영화의 미장센처럼 오감을 이용해 이미지를 연출하는 방법을 배웠죠.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도 나만의 색깔을 담은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술가는 실용이 아닌 창조이기에, 이명아 작가는 고독할지라도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다. 소위 말하는 미술계의 트렌드에 동조하거나, 대중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은 구상을 통해 갈등하는 과정을 모두 거쳐서 작가 스스로 이해가 되고 완성작으로써 타협을 이루었다는 의미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1차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이가 만든이와 꼭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갈증은 없다. 예술가의 관람자의 좋은 관계란 교감을 하고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미학에 있어 시대적인 업적을 남겼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이 피카소의 의도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건 아니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예술은 자기 만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이 생깁니다. 작업 과정이 재미 있는 거지, 힘든 과정을 애써 참아내며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각곡의 노력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거죠. 과정에서 생기는 고민이 작품으로 발현되어가는 결과를 보는 것은 오로지 나만, 만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거든요.”
흙으로 만든 기억의 조각
<2004년 월간 도예> 이명아 다섯 번째 개인전 '기억의 잔상'
'지붕'을 통한 기억의 잔상
도자에서의 현대적 개념이란 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표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를 서두에 나열하는 것은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갖게된 도예가 이명아의 작업을 통해 이해하기 위한 방편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명아를 20년 이상의 긴 과정을 통해, 그의 홍익대학 시절에서부터 미국 Pratt Institute 유학, 그리고 귀국 후의 오랜 기간 강사 생활과 지금의 서울산업대학교에 정착한 이후에 이르는 일련의 작가적 면모와 활동을 지켜 보아온 입장이다.
특히 근년 그의 작업 주제로 등판된 <기억의 잔상>은 작가로서의 일관된 의식 체계와 성숙된 자세를 보이면서 그 나름의 해법을 찾고자 고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그가 제시한 <기억의 잔상>은 자신이 의식하거나 경험해 왔던 과거에 대한 기억과 시간의 흐름이나 흔적과 연관된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지붕’이라는 매개적 요소를 조형의 근간으로 선택하고 있다. 이명아가 선택한 ‘지붕’은 네 가지로 그 유형을 구분하여 살펴 보아야 한다.
그 첫째 <Skyscape 2004>시리즈는 연작업(Smoked Fire)에 의한 흑도의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기와의 곡면으로부터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건축물의 구조나 형태와 연관하여 전개시킨 인간 군상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 그의 간결한 조형언어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둘째 작업 <Roofscape 2004>는 지붕구조의 가장 보편적 형식인 예각을 모티브로 하여 등거리에 의해 분할된 지점에 선재(구리, 유리, 실)를 이용한 시각적 변화를 부여함으로써 작가 스스로는 ‘인간의 개체적 달란트가 존재하는 의미’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 작업 <Afterimage of Memories>는 217개의 단위체 (210×210×55㎜)를 조합하여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붕의 이미지를 전개한 형식으로 개체별 각의 변화에서 얻어지는 선과 면, 그리고 음영의 연출은 구성적 효과를 배가 시켜주고 있다. 이 작업은 10개의 가압틀(PressMold)에서 만들어진 유니트를 건조시킨 다음 검정안료를 입힌 후 다시 황토(미국산 Black Bird)를 발라 스크레치 하거나 전사기법으로 장신한 후 1,150℃로 단벌 소성하여 얻어낸 다양한 효과들이다. 넷째 작업 <A Biref Sketch of Memories 2004>는 그의 상상력을 총합적 구성으로 엮어낸 도판 형식의 작업이다. 그가 선택한 지붕이라는 이미지 안에는 도시라는 배경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으며 이를 일종의 드로잉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현대도예를 표방하는 작가 이명아가 다섯 번의 전시를 거듭하며 작업이 더욱 성숙해지고 주제에 대한 제시가 선명해진 것은 작가로서의 역량과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픽토그램과도 같은 평면적 단순성이나 미니멀한 전개형식이 일관되게 지속한 점에 대해 찬사와 함께 긍정적 평가를 주고 싶다. 아울러 이번 작업에서 보여준 몇 가지 실험과 전개형식은 학생들에게 전달된 교육적 의미로도 평가 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주제가 우리에게 시적 이미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단순한 해석에서 답을 구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인간이 주거해 온 집이라는 구조물의 상단에 ‘지붕’이 자리하여 하늘과 맞닿는데서 그 의미를 깊게 해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기독교적 신앙과도 결부된 정신적 교감이나 인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세월의 흐름을 읽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작가 자신의 시각이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그 시각을 통해 포착된 기억의 잔상들을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묵한 메시지로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붕'을 통한 기억의 잔상
기하학적 구성과 자기완결적 형태
선으로 뻗은 도로와 그 사이에 놓인 격자구조의 마천루는 뉴욕이란 도시가 지닌 기하학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 어떤 경우 살벌하고 비인간적으로 비쳐질 수 있는 이 도시적 풍경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이루어진 화면공간 위를 수놓은 아름다운 색면으로 표현한 화가는 몬드리안이었다. 그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네덜란드에서 발표했던 신조형주의의 조형원리를 완성한 것으로서 순수한 추상회화일 뿐만 아니라 활력 넘치는 도시의 모습을 단순하며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 보여준 풍경화이기도 하다.
기하학적 구조가 지닌 심미성은 균제 · 질서 · 조화 등에 의해 더욱 고양되는데 그것은 도시란 거대공간에서 보다 건축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점은 미스 반 더 로에(Miss van der Rohe)의 냉정한 모더니즘 건축에서 명징성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직선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이 강조된 고색창연한 고건축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기와를 질서정연하게 올려놓은 전통건축물들을 보노라면 그지붕을 구성하고 있는 미세한 곡선보다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한 직선을 먼저 지각하는 경우가 많다. 즉각적이고 통합적으로 지각된 직선은 지붕이란 대상의 형상(shape)을 ‘구성된 형태’(composed form)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기하학적 구조물로부터 지각된 즉자적 현존(literal presentation)의 포착과 그것의 재구성은 이명아의 작품을 이루는 바탕이며 그 골격이다.
이명아의 작업은 지붕에서 발견한 직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뉴욕의 도시구조를 그린 몬드리안의 시점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부감법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작업은 수평적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본 평원법에 의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 특징적인 수직선의 줄무늬들은 이러한 시점을 잘 드러낸다. 형태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이자 그 춟라점인 선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까닭에 그의 작업에서 매스와 볼륨보다 회화적 화면구성이 더 두드러진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그의 작업과정은 이런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흙으로 형태를 구축하기 이전에 그는 세로로 길게 오린 사진들을 이른바 시프트(shift)기법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평면작업을 통해 선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입체로 구현할 경우 예측되는 회화적 효과를 미리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오려진 종이에 인쇄된 사진의 프레임들은 마치 기와의 낱장처럼 수직적 공간을 수많은 수평선으로 잘게 나누는 역할을 한다. 특이하게도 햇살을 받은 수키와와 암키와가 만들어내는 음영의 대비처럼 그의 종이작업은 평면으로서가 아니라 일정한 볼륨을 지닌 입체로 지각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런 요인들 때문에 그의 작업이 회화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의 흙작업은 평면 위에 압착된 물감이 만들어내는 물질성 보다 훨씬 실재감이 넘치는 물질성을 구현하고 있다. 회화는 환영(illusion)에 의해 상징을 만드렁내고 그것은 질료 너머에 있는 의미에 대해 유추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지만 라쿠기법에 의해 검게 소성된 흙은 그 생생한 질감을 그대로 내보이는 까닭에 자기존재를 은폐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게다가 신체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태가 엄격하게 절제된 선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순수조형이란 차원을 넘어서는 연상(association)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점은 지붕의 형상을 단순화하여 축소시킨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몇 개의 선으로 분할된 예리한 면들로 구성된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것에서 지붕을 떠올리기보다 자율적인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형태 못지 않게 그것을 감싸고 있는 표면질감의 그 즉자적 물질성은 이 작품의 자기완결성을 강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작업과정에 개입된 작가의 노동의 흔적이 작품의 독립된 대상성을 방해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제시하는 표지(標識)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그의 작업은 물질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규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지붕을 소재로 그 형식적 출발이 이루어졌고 결과에 있어서도 회화적으로 보일지언정 특정대상을 지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화와는 전혀 다른 지접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독립된 대상, 구조물이며 이런 점이 도예의 장르적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인지 모른다.
단순, 기하학적 형태와 반복적인 직선의 구성이 미니멀리즘과 관련을 밎고 있음에는 분명하지만 차갑고 중성적이며 몰개성하고 기계적인 미니멀리즘과 비교해볼 때 그의 작업은 엄격하게 정제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흙이란 재료가 환기하는 정서적 반응임과 동시에 손의 흔적이 녹아 있는 질감이 표면을 장식한 유약의 매끈한 투명성과 조화를 이루며 형태 너머에 있는 심미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점은 지붕의 선으로부터 유추된 줄무늬 못지 않게 작은 유니트들을 조립한 작업에서 잘 드러난다. 바닥공간에 물결처럼 서로를 지지하며 설치된 기와의 형태가 색채에 대한 금욕적 절제를 통해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반면 유니트의 조립작업은 지층와 그 위에 도열한 건축물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차, 작가에 의해 조합된 각각 성질을 달리하는 흙이 소성을 거치며 드러난 섬세한 색조의 차이, 다른 규격을 지닌 도판(陶版)들이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공간구성 등은 이 작품의 목표가 단순히 물질의 제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것은 흙담이나 보자기에서 볼 수 있는 단아하면서 정교한 구조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작지만 정교하고, 기하학적 엄격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아기자기한 이 작품을 통해 역사, 전통, 대지의 숨결, 태고의 신비를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이러한 문학적 서술성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흙 자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변주로 봐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의 작업에 두드러진 기하학적 구성과 자기완결적 형태는 물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성장하고 또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그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도시공간으로부터 습득된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여 작품을 감상적(感傷的) 차원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대칭, 균제, 비례, 질서의 심미적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작품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이상인 순수성의 지향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기하학적 구성과 자기완결적 형태